사람들은 어떠한 일들로 인해 현명한 판단을 하지 못하는 자신을 볼 때 괴로워하며 자탄에 빠져든다. 세상을 바라보며 결코 머리로서 세상을 직시하기보다 마음으로 바라보는 내 자신을 바라보았으면 하는…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찾아가고 싶은 내 자신… 어쩌면 자그마한 내 자신 속에 감춰놓았던 진솔함이 아닐까…. _ 장동수
작가 장동수는 첫 개인전을 전후로 자신의 일상적 체험과 감정들을 인간의 존재에 대한 사유로 풀어내는 개념적 작업들을 보여주었다. ‘삶’, ‘존재와 의식’, ‘생각의 지배’, ‘자아의 진실’, ‘벗겨진 상반신’, ‘파괴’, ‘캡슐 속의 자아’, ‘몸 속의 자연’, ‘나비가 되어’,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하더라도’ 등 제목이 명시하듯이, 다소 진지하고 진중한 사유과정들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교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특이한 작가의 이력과 상상력이 디지털매체와 결합하여 시각적인 스펙터클을 펼쳐왔다.
두 번째 개인전 <무뇌아이>를 준비하며 작가는 매체와 어조에 급격한 변화를 시도한다.
“친구의 아들, 딸들이 함께 놀러왔는데, 제 작업을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하더라고요. 무섭다고 근처에도 가지 않는 거예요.”
그는 ‘보지 못하는 스펙터클’과 ‘다가설 수 없는 예술’이라는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해결의 실마리는 문제의 출발점이었던 아이들이었다. 삼등신 정도? 커다란 머리, 좁은 어깨와 가슴, 앞뒤로 볼록한 엉덩이와 배, 유난히 배꼽이 툭 튀어나온 무뇌아이들은 어린 날 작가 장동수가 공책 한 귀퉁이에 그적이던 만화 속 주인공들이자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 그대로다. 무뇌아이는 작가의 기억으로부터 그의 손을 거쳐 형태와 색채를 부여받고 광채까지 발하며 태어난다. 그리고 작가는 무뇌아이를 통해 아이의 감수성으로 돌아가려는 몸짓을 보인다. 무뇌아이는 커다란 자신의 머리가 무거운지 뇌를 살짝 꺼내 올린다. 날개를 달아주자마자 하늘 위로 떠오르는 뇌를 잡고 따라 올라가려하지만 둥실 머리 위로 날아가 버린다.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폴짝 뛰어올라보기도 하고, 턱을 괴고 엎드려 뒹굴뒹굴 사색에도 빠져보고, 지쳤는지 서로 등을 맞대고 곤히 잠이 들기도 하며 무뇌아이의 유희가 펼쳐진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어른으로서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애써 구비해왔던 ‘개념들’에 날개를 달아 날려 보냈건만, 참으로 이상한 점은 무뇌아이의 머릿속에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화수분마냥 차오른다는 것이다. 복잡한 세상사에 눈, 코, 입의 감각들을 모두 막아보지만, 결국엔 무표정한 모습만 남아버렸다. 한편으로는 퇴화된 흔적처럼 달린 귀를 바짝 세워서 무엇이든 일정량을 채워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지도 모를 일이다. 무뇌아이가 딛고 선 현실은 날개 달린 뇌와 함께 날아오르려는 무뇌아이의 발을 놓아주지 않는다. 아니, 이 또한 어쩌면 무뇌아이 스스로 이내 ‘아차!’하며 잡아 내리려고 안간힘을 쓰는지도 모르겠다. 처진 어깨와 좁아진 가슴, 중력을 어찌할 수 없는 엉덩이와 뱃살, 애초에 날 수 없는 태생임을 증명하는 배꼽.
다른 이름도 없이, 단지 작가의 기억 속 주소로 불리는 무뇌아이들의 출현과 유희는 우리에게 참을 수 없는 존재와 삶의 무게감을 느끼게 한다.
무뚝뚝한 얼굴에 눈과 입을 빚어주고, 숨이라도 한번 크게 쉴 수 있게 콧구멍이라도 뚫어줄 수 있다면, 배와 엉덩이를 꾹꾹 눌러 올려서 넓고 커다란 가슴으로 바꿀 수만 있다면, 머릿속에 차오르는 현실에 대한 미련들을 머리에 달린 귀를 잡고 내다버릴 수만 있다면.
그러나 무뇌아이의 외피는 무뇌아이가 살아온 날만큼 단단하다._ SON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