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cal sculpture (Dongsu Jang_1st solo exhibition)

MEDICAL SCUPTURE

JANG DONG SU Solo Exhibition
2007.4.25. WED – 5.1 THU
CUBE SPACE (SEOUL)

본인의 작품의 특징은 의학적인 요소와 조각을 접목시켜‘의학조각(medical sculpture)’을 시도하고 있다. 몇 몇 작품들 중에는 비록 평면 사진이지만 작업 과정 자체에는 칼로 인체의 피부를 벗기고 근육을 잘라 얕은 층에서 깊은 층으로 해부하는, 외부에서 내부로 조각해 들어가는 조각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작품 제작 과정에는 조각의 공간감과 부피가 있고 도구 개념으로 메스를 사용하였다. 조각적 요소와 의학적 해부학을 접목시켜 표현하고 있는 본인의 작품에서는 그동안 대부분 작가들이 했었던 이미지 메이킹 방식에서 탈피하여 실제 실습용 사체를 해부하여 실제 이미지에 소묘나 디지털 작업 같은 예술적 요소를 가미하였다. 방법론적으로는 시체 해부와 조각 작업 과정의 유사성을 끌어내고 내용적으로는 죽음 이후에 다시 한번 숙고하게 되는 개인의 정체성, 개인이 살았던 삶, 사회와 개인의 관계,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통해 조각 방식과 유사한 시체 해부 과정에 의미를 부여하고 예술적 요소를 가미하여 ‘의학 조각’이라는 개념을 새로이 제시했다는데 본인의 작업의 의의가 있다.

생명공학과 환경문제는 오늘날 매우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인체에 대한 관심은 모든 이들의 관심의 대상이며 끊임없는 연구의 대상이기도 하다. 지금도 인간은 인체에 대한 해답을 찾아 미지의 세계를 찾아가고 있다. 현대미술에 있어 몸은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까다로운 주제 중 하나이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술의 중심 주제로서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는 점이다.

신체는 역사적으로 볼 때 ‘윤리’란 명목으로 억압과 통제를 받아 왔다. 하지만 몸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이르러 과학, 철학, 예술 등에서 중심적 담론으로 회자되고 있다. 미술사에 있어서 과거의 신체와 지금의 신체는 분명 다르다. 과거의 신체가 이상적으로 재현되어야할 미적 대상의 극치였다면, 현재의 신체는 세상과 교류하는 하나의 영역으로서 변형, 왜곡, 또는 파편화된다. 과거의 신체가 몸에 대한 완전성을 추구했다면 현재의 신체는 오히려 불완전성을 드러내고 인정하고 있다. 이것이 양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다.

본인은 의과대학 해부학 교실에서 의학 삽화가로서 일하면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인체 해부학에 대한 지식과 이제껏 체험하지 못했던 해부경험들을 하게 되었다. 해부대에 누워있는 시신들을 접하면서 몸속의 광활한 소우주를 보았으며 조물주의 위대함을 느끼는 동시에 인간의 삶과 죽음을 깊이 드려다 보게 되었다.

인간은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지나쳐야 할 또 하나의 과정이다. 죽음은 생명의 종말이지만 어쩌면 새로운 삶과 진정한 휴식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성찰을 통해서 인간은 죽음의 문제를 좀 더 객관화하고 죽음의 슬픔과 공포를 조금이나마 초극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본인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해부학 교실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인간의 몸에 드러나는 생명의 질서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느끼는 본질적 문제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 장동수

 

“장동수 조각전” 해부학 교실에서 기원전 2세기 로마의 갈렌(Galen BC.130-200)으로부터 해부학이 시작하여, 새로운 개념으로 해부학을 체계화한 베살리우스(Vesalius 1514-1564), 현대 해부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르네상스의 대표적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가 있다. 13세기부터 싹트기 시작한 예술의 사실주의는 15세기에 들어와 성숙하게 된다. 이때 정확하게 우리 몸의 형상을 표현하고자 여러 예술가들이 사람 해부를 하게 된다. 레오나르도는 남녀노소 30여구의 시신을 해부하고 정밀한 해부도를 750개 넘는 그림과 기술하였다. 그 외 라파엘로, 지오토, 미켈란젤로 등도 해부를 통해 인체구조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얻었다.

고대 서양 예술은 사실적이고 생생한 묘사를 강조했으며, 그 당시의 예술가들은 반드시 인체의 각 부분에 대한 비례와 골격, 근육의 형태, 구조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한 후 인체를 대상으로 하는 예술을 할 수 있었다. 그 후에도 인체는 미술 속에서 가장 많이 다루어왔던 작품의 소재이며 그 형태의 변형과 왜곡뿐만 아니라 내면의 심미적 표현까지 나타내곤 했다. 20세기에 등장한 아방가르드운동 속에서 미술은 더 이상 전통적인 조화와 비례의 아름다움에 얽매이지 않는다.

현재 한국에서 미술해부학의 권위자라 할 수 있는 조용진 선생은 우리의 몸과 미술에서“해부학을 공부하면서 인간이 무엇인지, 자연이 무엇인지, 또 신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풀어야 알 수도 없는 의문들이지만 , 나의 사고를 성숙하게 해준 것만은 틀림없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장동수 역시 해부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의과대학의 해부학 교실에서 직접적인 해부 경험을 통해 그 구조의 신비와 조물주의 위대함 그리고 삶과 죽음에 관하여 많은 생각을 하였으리라 생각된다.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생명의 존엄성을 느끼고, 우리 삶의 근원인 자신의 몸을 돌아보게 하는 장동수의 이번 조각전은 새로운 시각예술의 장이 될 것이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해부학 교실에서 인간의 몸에 드러나는 삶의 흔적들과 실재 해부한 표본을 보고, 그것을 조각과 그림으로 승화시켜 표현하여 인간의 삶과 죽음의 경계를 들여다 보려한다.”는 작가는 인간 복제에 따른 윤리문제, 끝없이 진보하는 사회, 한 생명체로써의 존재감 혹은 정체성, 기계 심장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등, 현시대의 휴머니즘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과학과 의술 그리고 생명공학의 발달로 인하여 건강한 삶과 얼마간의 생명연장을 가져오긴 했지만 아직도 죽음이란 한계를 극복할 순 없다. 아니 죽음이란 생명을 지닌 만물의 고유 권한인 것이다. 영화 “바이센테니얼맨(Bicentennialman)”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연기한 가정 도우미 로봇 ‘앤드류’는 제조과정에서 두뇌회로 부분에 마요네즈가 들어간 덕분에 감정을 갖게 된다. 인간이 되고 싶었던 앤드류는 늙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나이에 맞게 끊임없이 개조하며, 사랑을 이루고 결국엔 그가 원했던 고귀한 죽음까지 맞는다.  이렇듯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지닌 하나의 미덕인지도 모른다. 영원히 살려는 인간의 염원은 헛된 꿈은 아닌지?  로봇이 되기 위해 머나먼 우주여행을 떠났던 은하철도999의 철이를 생각하면 로봇의 꿈이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꿈이 로봇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섬뜩하다.

톨스토이는 죽음에 관한 시에서 “이 세상에 출생할 때 그대는 울었으나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기뻐했을 것이고, 그대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많은 사람들은 슬피 울 것이나 그대는 미소를 띄우리라”와 같이 삶과 죽음이 시각차가 있음을 말한다.  장동수가 인체를 바라보는 시각은 인체의 겉모습이 아니라, 인공두뇌를 만들고 노화된 부분을 교체하고, 기계장기를 작동시키며 삶을 연장시켜 나아가는 미래형 인간을 비웃는 듯하다. 살아있는 또는 모진풍상의 세월을 견뎌오며 제 역할을 다한 각부의 계통(system) 즉 골격계, 근육계, 신경계, 맥관계, 호흡기계, 소화기계, 비뇨생식기계, 임파계, 피부계에 대한 찬사인 것이다.  이렇듯 장동수의 인체에 대한 관심은 주관적이기보다는 다소 객관적이며, 냉정하게 이성적인 시각의 탐구적 대상이다.  작가는 우리에게 죽음을 또 하나의 삶으로 바라볼 수 있는 관점과 표피적인 아름다움보다는 생물학적 또는 과학적 탐구의 미에 시선을 돌려 보아주길 원하고 있는 것이다. ■ 임승오

2018-03-19T19:00:2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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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CAL SCUPTURE

JANG DONG SU Solo Exhibition
2007.4.25. WED – 5.1 THU
CUBE SPACE (SEOUL)

본인의 작품의 특징은 의학적인 요소와 조각을 접목시켜‘의학조각(medical sculpture)’을 시도하고 있다. 몇 몇 작품들 중에는 비록 평면 사진이지만 작업 과정 자체에는 칼로 인체의 피부를 벗기고 근육을 잘라 얕은 층에서 깊은 층으로 해부하는, 외부에서 내부로 조각해 들어가는 조각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작품 제작 과정에는 조각의 공간감과 부피가 있고 도구 개념으로 메스를 사용하였다. 조각적 요소와 의학적 해부학을 접목시켜 표현하고 있는 본인의 작품에서는 그동안 대부분 작가들이 했었던 이미지 메이킹 방식에서 탈피하여 실제 실습용 사체를 해부하여 실제 이미지에 소묘나 디지털 작업 같은 예술적 요소를 가미하였다. 방법론적으로는 시체 해부와 조각 작업 과정의 유사성을 끌어내고 내용적으로는 죽음 이후에 다시 한번 숙고하게 되는 개인의 정체성, 개인이 살았던 삶, 사회와 개인의 관계,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통해 조각 방식과 유사한 시체 해부 과정에 의미를 부여하고 예술적 요소를 가미하여 ‘의학 조각’이라는 개념을 새로이 제시했다는데 본인의 작업의 의의가 있다.

생명공학과 환경문제는 오늘날 매우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인체에 대한 관심은 모든 이들의 관심의 대상이며 끊임없는 연구의 대상이기도 하다. 지금도 인간은 인체에 대한 해답을 찾아 미지의 세계를 찾아가고 있다. 현대미술에 있어 몸은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까다로운 주제 중 하나이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술의 중심 주제로서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는 점이다.

신체는 역사적으로 볼 때 ‘윤리’란 명목으로 억압과 통제를 받아 왔다. 하지만 몸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이르러 과학, 철학, 예술 등에서 중심적 담론으로 회자되고 있다. 미술사에 있어서 과거의 신체와 지금의 신체는 분명 다르다. 과거의 신체가 이상적으로 재현되어야할 미적 대상의 극치였다면, 현재의 신체는 세상과 교류하는 하나의 영역으로서 변형, 왜곡, 또는 파편화된다. 과거의 신체가 몸에 대한 완전성을 추구했다면 현재의 신체는 오히려 불완전성을 드러내고 인정하고 있다. 이것이 양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다.

본인은 의과대학 해부학 교실에서 의학 삽화가로서 일하면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인체 해부학에 대한 지식과 이제껏 체험하지 못했던 해부경험들을 하게 되었다. 해부대에 누워있는 시신들을 접하면서 몸속의 광활한 소우주를 보았으며 조물주의 위대함을 느끼는 동시에 인간의 삶과 죽음을 깊이 드려다 보게 되었다.

인간은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지나쳐야 할 또 하나의 과정이다. 죽음은 생명의 종말이지만 어쩌면 새로운 삶과 진정한 휴식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성찰을 통해서 인간은 죽음의 문제를 좀 더 객관화하고 죽음의 슬픔과 공포를 조금이나마 초극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본인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해부학 교실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인간의 몸에 드러나는 생명의 질서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느끼는 본질적 문제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 장동수

 

“장동수 조각전” 해부학 교실에서 기원전 2세기 로마의 갈렌(Galen BC.130-200)으로부터 해부학이 시작하여, 새로운 개념으로 해부학을 체계화한 베살리우스(Vesalius 1514-1564), 현대 해부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르네상스의 대표적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가 있다. 13세기부터 싹트기 시작한 예술의 사실주의는 15세기에 들어와 성숙하게 된다. 이때 정확하게 우리 몸의 형상을 표현하고자 여러 예술가들이 사람 해부를 하게 된다. 레오나르도는 남녀노소 30여구의 시신을 해부하고 정밀한 해부도를 750개 넘는 그림과 기술하였다. 그 외 라파엘로, 지오토, 미켈란젤로 등도 해부를 통해 인체구조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얻었다.

고대 서양 예술은 사실적이고 생생한 묘사를 강조했으며, 그 당시의 예술가들은 반드시 인체의 각 부분에 대한 비례와 골격, 근육의 형태, 구조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한 후 인체를 대상으로 하는 예술을 할 수 있었다. 그 후에도 인체는 미술 속에서 가장 많이 다루어왔던 작품의 소재이며 그 형태의 변형과 왜곡뿐만 아니라 내면의 심미적 표현까지 나타내곤 했다. 20세기에 등장한 아방가르드운동 속에서 미술은 더 이상 전통적인 조화와 비례의 아름다움에 얽매이지 않는다.

현재 한국에서 미술해부학의 권위자라 할 수 있는 조용진 선생은 우리의 몸과 미술에서“해부학을 공부하면서 인간이 무엇인지, 자연이 무엇인지, 또 신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풀어야 알 수도 없는 의문들이지만 , 나의 사고를 성숙하게 해준 것만은 틀림없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장동수 역시 해부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의과대학의 해부학 교실에서 직접적인 해부 경험을 통해 그 구조의 신비와 조물주의 위대함 그리고 삶과 죽음에 관하여 많은 생각을 하였으리라 생각된다.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생명의 존엄성을 느끼고, 우리 삶의 근원인 자신의 몸을 돌아보게 하는 장동수의 이번 조각전은 새로운 시각예술의 장이 될 것이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해부학 교실에서 인간의 몸에 드러나는 삶의 흔적들과 실재 해부한 표본을 보고, 그것을 조각과 그림으로 승화시켜 표현하여 인간의 삶과 죽음의 경계를 들여다 보려한다.”는 작가는 인간 복제에 따른 윤리문제, 끝없이 진보하는 사회, 한 생명체로써의 존재감 혹은 정체성, 기계 심장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등, 현시대의 휴머니즘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과학과 의술 그리고 생명공학의 발달로 인하여 건강한 삶과 얼마간의 생명연장을 가져오긴 했지만 아직도 죽음이란 한계를 극복할 순 없다. 아니 죽음이란 생명을 지닌 만물의 고유 권한인 것이다. 영화 “바이센테니얼맨(Bicentennialman)”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연기한 가정 도우미 로봇 ‘앤드류’는 제조과정에서 두뇌회로 부분에 마요네즈가 들어간 덕분에 감정을 갖게 된다. 인간이 되고 싶었던 앤드류는 늙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나이에 맞게 끊임없이 개조하며, 사랑을 이루고 결국엔 그가 원했던 고귀한 죽음까지 맞는다.  이렇듯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지닌 하나의 미덕인지도 모른다. 영원히 살려는 인간의 염원은 헛된 꿈은 아닌지?  로봇이 되기 위해 머나먼 우주여행을 떠났던 은하철도999의 철이를 생각하면 로봇의 꿈이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꿈이 로봇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섬뜩하다.

톨스토이는 죽음에 관한 시에서 “이 세상에 출생할 때 그대는 울었으나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기뻐했을 것이고, 그대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많은 사람들은 슬피 울 것이나 그대는 미소를 띄우리라”와 같이 삶과 죽음이 시각차가 있음을 말한다.  장동수가 인체를 바라보는 시각은 인체의 겉모습이 아니라, 인공두뇌를 만들고 노화된 부분을 교체하고, 기계장기를 작동시키며 삶을 연장시켜 나아가는 미래형 인간을 비웃는 듯하다. 살아있는 또는 모진풍상의 세월을 견뎌오며 제 역할을 다한 각부의 계통(system) 즉 골격계, 근육계, 신경계, 맥관계, 호흡기계, 소화기계, 비뇨생식기계, 임파계, 피부계에 대한 찬사인 것이다.  이렇듯 장동수의 인체에 대한 관심은 주관적이기보다는 다소 객관적이며, 냉정하게 이성적인 시각의 탐구적 대상이다.  작가는 우리에게 죽음을 또 하나의 삶으로 바라볼 수 있는 관점과 표피적인 아름다움보다는 생물학적 또는 과학적 탐구의 미에 시선을 돌려 보아주길 원하고 있는 것이다. ■ 임승오

2018-03-29T12:53:14+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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